ndaily

[걷고 싶은 길] '천년 사랑' 백제가요 정읍사 오솔길
기사 작성일 : 2024-05-03 09:01:17


정읍사 오솔길[사진/백승렬 기자]

(정읍= 현경숙 기자 = 정읍은 한국에서 단풍이 가장 풍성한 내장산을 품은 고장이다. 내장산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깃들고, 단풍보다 더 붉은 혁명의 깃발이 휘날리던 곳이기도 하다. 정읍은 천년 사랑을 노래한 백제가요 '정읍사'가 태어난 곳이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사랑과 혁명의 공통 분모는 열정이리라.

◇ 유일하게 전하는 백제가요…정읍사

백제가요는 다섯 곡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무등산가, 방등산곡, 선운산가, 지리산가, 정읍사이다. 이 중 가사가 전하는 곡은 정읍사가 유일하다. 나머지는 곡명과 유래만 알려졌을 뿐이다.

정읍사는 한글로 가사가 전하는 가장 오래된 노래이기도 하다. '달하 높이곰 도드샤'로 시작하는 시적인 구절은 정읍사를 한번 들으면 잊지 못하게 만든다. 정읍사는 행상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된 백제 여인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다.

이 사랑을 되새기며 걸을 수 있는 호젓한 소나무 숲길이 있다.



정읍사 공원의 망부상[사진/백승렬 기자]

정읍사 (井邑詞)

달님이시여

높이 높이 돋으시어

어기야차 멀리멀리 비치게 하시라

어기야차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시장에 가 계신가요

어기야차 진 곳을 디딜세라

어기야차 어강됴리

어느 것이나 다 놓으시라

어기야차 나의 가는 곳에 저물세라

어기야차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현대어 풀이)

정읍천변에서 멀지 않은 정읍사 공원에서 시작해 월봉 등산로를 따라가다 월영마을에 이르는 6.4㎞의 '백제가요 정읍사 오솔길' 1코스이다.

이 오솔길은 내장호수 길인 2코스와 정읍천변 자전거 길인 3코스가 더해져 모두 3개 코스로 구성된다. 1, 2, 3코스를 모두 합하면 약 17㎞이다.

1, 2코스를 이어 걸어도 큰 부담이 되지 않으며 1, 2코스를 걸은 뒤 3코스에서 자전거를 타면 출발점인 정읍사 공원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다.

정읍사 공원에는 '샘고을'이라는 정읍의 명성에 걸맞은 큰 약수터가 있었다. 수량이 많아 물을 받아 가는 시민이 줄을 잇고 있었다.

대부분의 도심 약수터가 오염된 것과 비교하면 정읍의 물이 얼마나 맑고 풍부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동진강 발원지인 정읍천을 따라 공원으로 가는 도로변에는 벚꽃이 만개했다.



정읍천변 벚꽃[사진/백승렬 기자]

천변 고수부지에는 벚꽃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정읍 9경' 중 하나인 공원에는 정읍사의 주인공인 백제 여인이 망부석이 돼 서 있었다.

두 눈은 아득히 먼 어느 지점을 응시한 채. 그곳은 장에 간 남편이 되짚어오기로 돼 있던 고갯마루인 듯 했다. 공원에 흐드러지게 핀 목련과 벚꽃은 여인의 슬픔을 위로하는 듯했다.

공원에서 출발해 안경광학과, 간호학과 등 보건 계열 학과의 지명도가 높은 전북과학대학교를 지나면 오솔길 1코스 들머리가 나온다. 오솔길은 가파르지 않은 산길이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맞은편에서 산악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는 라이더와 마주쳤다. 1코스는 걷기 좋은 산길이지만 험하지 않아 산악자전거 길로도 손색이 없었다.

◇ 소나무 그늘에 곱게 핀 진달래

오솔길은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나 있었다. 빽빽한 소나무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그 그늘에서 곱게 피어난 진달래 무더기였다. 응달에서 자란 탓인지 꽃잎은 여렸고 색은 연분홍이었다.

오솔길 중간에 남사면 전망대와 북사면 전망대가 있었다. 남사면 전망대에 서니 멀리 노령산맥에 속하는 삼성산, 입암산, 방장산 등이 보였다. 산봉우리 사이에 새재, 갈재가 있었다.



정읍사 오솔길에 핀 진달래[사진/백승렬 기자]

옛적에 전북과 전남을 잇던 주요 고개들이다. 노령산맥의 이름은 갈재에서 유래했다. '노령'은 갈대가 많은 고개란 뜻이다. 갈대는 주로 물가에서 자라고 산 위에는 억새가 많다.

생김새가 비슷한 억새와 갈대를 혼동한 데서 '노령'이란 이름이 생겼을지 모르겠다. 노령의 해발고도는 206m이다. 입암산 정상부에는 입암산성이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때 전봉준은 관군을 피해 입암산성 쪽으로 피신했었다. 입암산의 거대한 바위 봉우리가 멀리서도 뚜렷했다.

북사면 전망대에서는 호남정맥에 속하는 고당산, 망대봉, 칠보산이 조망된다.

칠보산은 정읍의 진산이다. 높이에 비해 골이 깊어 임진왜란, 동학농민혁명 때 민중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 칠보산 아래 금붕동 금북 마을의 옥녀봉은 풍수지리상 옥녀탄금형에 해당한다고 한다.

옥녀봉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면 맞은 편 종산에서 '둥둥' 쇠북이 울렸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산 아래쪽에 정읍우도농악전수관이 들어서 있다. 풍수설의 내용처럼 악기와 인연이 깊은 곳인가 보다.



월영습지[사진/백승렬 기자]

오솔길은 7개 구간으로 나뉘어 만남의 길, 환희의 길, 고뇌의 길, 언약의 길, 실천의 길, 탄탄대로의 길, 지킴의 길로 이름 붙여져 있었다.

부부가 함께 가는 인생 역정을 표현한 명칭들이다. 1구간 만남의 길 푯말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이 길~. 이 신선하고 풋풋한 숲의 향기, 당신과 함께 시작하기에 얼마나 기쁘고 설레는지요'라는 글귀가 인연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두꺼비 바위를 지나 월영 습지보호 지역에 이르면 저층형 산지습지를 만날 수 있다. 평지와 산지의 특성을 모두 가진 이 습지는 독특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멸종위기종을 포함해 생물다양성이 풍부하다. 월영 습지는 옛날 다랑논 형태의 농경지였으나 방치되면서 인위적 간섭이 배제되고 자연 천이가 일어났다. 환경부는 이곳을 2014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했다.

습지에서 비탈길을 내려가면 오솔길의 종착지인 월영마을에 도착한다. 종착지 근처에는 목공예체험장, 임산물체험단지, 향기 식물원, 내장산문화광장, 국민여가캠핑장 등 문화, 여가 시설이 많았다.

캠핑장은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핫플'이란다. 1코스 종착지에서 10분쯤 걸어가면 둘레에 2코스 내장호수 길이 조성된 내장호에 이른다.



황토현 전적지 동학농민혁명 기념 조형물[사진/백승렬 기자]

내장호를 중심으로 전봉준 공원, 갑오 동학 100주년 기념탑, 내장산조각공원, 내장산 단풍생태공원 등이 펼쳐졌다. 전날 내린 비로 내장호의 물은 한껏 불어나 있었다.

둘레길 높이 가까이 차오른 물은 넘칠 듯 찰랑거렸고, 버드나무는 허리까지 물에 잠겨 있었다. 안개가 떠다니는 수변을 시민들이 걷고, 뛰는 모습은 평화가 충만한 풍경이었다.

◇ 사람이 하늘이 되고…동학농민혁명 130주년

오솔길을 걸으면 곳곳에서 동학의 숨결을 느끼게 된다. 2024년은 1894년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의 130주년이다. 5월 11일은 동학농민혁명의 날이다. 지난 2019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이날은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싸워 첫 대승을 거둔 황토현 전투가 벌어진 날이다. 황토현은 현재 행정구역상 정읍시에 속한다.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못 견뎌 농민들이 들고일어났던 옛 고부군의 대부분도 지금은 정읍시에 속한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멀지 않은 황토현 전적지는 전두환 전 대통령 지시로 1981년 성역화됐다.



내장호 전경[사진/백승렬 기자]

정읍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동학농민혁명을 '1894년 3월에 봉건 체제의 개혁을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동학의 항쟁 정신은 3·1운동, 항일의병운동, 4·19혁명, 5·18광주민화화운동,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동학농민혁명의 명칭은 변화를 거듭했다. 동학란, 민란 등으로 불리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인 1970년에 동학혁명, 동학혁명운동으로 바뀌었으며 1990년대 동학농민운동으로 지칭되다 최종적으로 동학농민혁명으로 정립됐다.

명칭 변천사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시대에 따라 바뀌어왔음을 보여준다. 인류사를 통틀어 '사람이 곧 하늘이고 하늘이 곧 사람이다'는 것만큼 혁신적이고 고귀한 사상이 있을까. 선조들의 외침을 여전히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후대의 부끄러움이다.

1894∼1895년 조선에서 발발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185점의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4·19혁명 기록물 1천19점과 함께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백성들이 주체가 돼 자유, 평등, 인권의 보편 가치를 지향하기 위해 노력했던 세계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은 결과다.

산 안에 감춰진 것이 무궁무진하다는 내장산 단풍이 불타는 듯 아름다운 것은 사랑의 기다림과 혁명의 격정을 간직하기 때문이리라.

※이 기사는 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4년 5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