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미숙 기자 = 정부가 내년부터 30가구 이상 사업승인 대상 민간 아파트도 '제로에너지 건축물 인증'을 받도록 하면서 건설업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는 당초 올해 시행하려던 것을 내년으로 연기하고, 기준도 종전보다 완화한 만큼 내년 6월 말부터는 관련 제도를 시행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건설업계는 최근 공사비 상승과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로 어려움이 큰 가운데 주택시장의 부담으로 작용한다며 시행 연기 등을 요구하고 있다.
서울 아파트 모습 [ 자료사진]
◇ "5등급 수준 맞추려면 아파트 벽면에도 태양광 설치해야"…공사비도 이견
제로에너지 건축물은 에너지 절감과 신재생에너지 설비 등을 활용해 에너지 소요량을 자체적으로 충당하는 친환경 건축물을 말한다.
에너지 자립률에 따라 1∼5등급으로 분류하는데, 2020년 1천㎡ 이상 공공건물에 대해 5등급(에너지 자립률 20∼40%) 인증을 의무화한 뒤 현재 공공이 30가구 이상 짓는 공동주택에 5등급 인증을 받도록 하고 있다.
정부는 이 인증을 올해 안에 30가구 이상 민간 아파트로 확대할 방침이었으나, 건설경기 침체 등을 고려해 내년으로 미뤘다.
국토교통부가 지난달 행정예고한 '에너지절약형 친환경주택 건설기준'은 그간 건설업계와 논의를 거치며 성능 기준이 당초 '5등급'에서 '5등급 수준'으로 다소 완화됐다.
현실적으로 국내 아파트 단지 환경에서 1차 에너지 소요량이나 에너지 자립률을 5등급 기준에 맞추기가 어렵다고 보고 5등급에 준하는 수준으로 기준치를 낮춘 것이다.
단위면적당 1차 에너지 소요량의 달성 여부를 판단하는 성능기준의 경우 현재 설계기준(120kWh/㎡·yr)보다는 향상되지만, 5등급 설계기준(90kWh/㎡·yr)보다는 완화된 새 기준(100kWh/㎡·yr)을 적용하는 식이다.
등급 인증을 충족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현관문, 창호, 단열재 등의 성능과 기밀성을 높여 에너지를 절감하고, 태양광, 지열,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설비를 통해 에너지 자립률을 높이는 것이다.
국토부는 이번 제로에너지 건축물 성능 강화에 따라 가구당 약 130만원(전용면적 84㎡ 기준)의 건축비용이 추가될 것으로 전망했다.
반면 건설업계는 이러한 기준 충족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신재생에너지 설비와 관련한 문제를 우선 꼽는다.
우리나라 기후나 아파트라는 공간 특성상 사용 가능한 신재생에너지 설비는 결국 태양광인데, 단지 옥상에 에너지 자립률을 충족할 만한 설치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건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아파트 옥상의 경우 여러 구조물과 음영 발생 문제 등으로 태양광 설치에 필요한 가용면적이 전체의 50∼60%에 불과하다"며 "인증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단지들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옥상 공간이 부족하면 아파트 벽면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할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미관을 해치는 것은 물론 빛 반사 등의 민원 발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업계는 우려한다.
벽면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면 공사비도 2배 이상 든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벽면 쪽 설치의 편의를 위해 건물 일체형 태양광 모듈이 적용되면 패널 단가와 공사비가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며 "국내 태양광산업이 영세해 앞으로 늘어난 수요를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대형 건설사들의 모임인 한국주택협회는 5등급 수준의 인증 기준을 맞추려면 전용 84㎡ 기준 가구당 공사비가 최소 293만원 이상 늘어날 것으로 추산했다. 이는 국토부 예상치보다 2배 이상 높다.
태양광 설치 후 관리상의 어려움도 클 것으로 우려한다.
건설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태양광 패널의 문제는 넓은 설치 면적과 동시에 패널 교체 등 주기적인 유지관리에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든다는 것"이라며 "설치도 어렵지만 관리가 더 큰 문제인데 입주자 대표회의가 지속적으로 유지보수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공동주택을 지을 때 5등급 인증을 통과해도 입주 후 몇 년이 지난 뒤 성능 기준을 충족하는지 제대로 검증·관리가 이뤄지지 않는다"며 "빛 좋은 개살구에 그칠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신기술 개발에 취약한 중소 건설사들은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중견 건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형 건설사는 단열재나 마감재 등에서 기술개발로 성능 개선을 하고 있지만, 중소 건설사는 기술력에서 역부족"이라며 "에너지 절감 기능이 떨어지면 태양광 등 설치 부담은 더 커질 수밖에 없어서 막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태양광 설비가 설치된 서울의 한 아파트 모습 [ 자료사진]
◇ 층간소음 등 공사비 인상 요인 줄이어…업계 "시행시기 조절 등 필요"
건설업계는 지난 2일에 끝난 행정예고 기간 국토부에 시행 시기를 추가로 유예하거나 기준을 더 완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일각에서는 아파트 단지 내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설치에 제약이 많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고려해 지방자치단체가 대체 부지를 확보해주거나, 설치비용을 에너지 기금 등의 방식으로 대체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반면 국토부는 이미 업계 의견을 반영해 시행 시기를 연기하고, 기준도 완화한 만큼 추가 대응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친환경 주택 건설은 범정부 차원의 탄소중립과 온실가스 저감 목표 달성을 위해 추진되는 것으로 공동주택에 적용이 지연되는 것에 대한 정부 내 우려가 있다"며 "앞으로 규제심사 결과를 봐야겠지만 내년 6월 말부터 원안대로 시행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건설업계에서는 최근 공사비가 급등한 상황에서 공사비 인상 요인이 계속 증가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따르면 주거용 건물의 건설공사비지수는 2020년 1월 118.30에서 올해 2월 기준 154.81로 지난 4년 동안 30.9% 상승했다.
주 52시간 근무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시공 현장에 투입되는 건설원가가 과거보다 커진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가 급등해 공사비 부담이 확대된 것이다.
고금리와 건설경기 침체 여파로 미분양이 늘고 PF 부실 우려가 커지며 인허가와 착공 물량이 감소하는 등 주택시장의 공급 위축도 심화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공사비 인상에 영향을 줄 만한 정부 정책들은 줄줄이 대기 중이다.
정부는 현재 친환경 주택 건설 외에 신축 아파트가 층간소음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준공을 불허하고 보완공사를 하거나 입주민에게 금전적 손해배상을 하도록 하는 법 개정도 추진 중이다.
층간소음 기준을 강화하면 공사비 증가는 물론, 보완 시공과 손해배상에 투입되는 비용이 막대할 전망이다.
층간소음 성능검사기관인 국토안전관리원은 최근 발표한 층간소음 손해배상 가이드라인 연구 보고서에서 층간소음 기준 초과 시 적정 손해배상금을 가구당 최고 2천800만원(전용 84㎡ 기준)으로 제시해 논란이 됐다.
오는 7월부터 신축 아파트의 입주자 사전 점검 전에 내부 마감공사를 모두 마치도록 한 주택법 시행령 개정도 공사비 증가 요인으로 꼽힌다.
문제는 공사비 증가가 고스란히 분양가 상승으로 이어져 소비자에게 부담이 전가된다는 것이다.
재건축·재개발 등 정비사업은 최근 공사비 증가로 인해 조합원 추가 분담금이 늘면서 사업추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문가들은 친환경 주택이나 층간소음 개선 등 정부 정책의 근본 취지는 바람직하지만, 최근 건설시장 여건을 고려해 공사비 인상으로 이어지는 규제 정책을 순차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대한건설협회 관계자는 "현재 정부안이 사회 환경과 인식의 변화로 필요한 정책들이지만 공사비가 급등하는 현시점에 동시다발적으로 규제를 강화할 경우 더 큰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며 "범정부 차원의 컨트롤타워를 두고 상대적으로 시급하지 않은 문제는 시행 시기를 일정 기간 유예하는 등 시장의 부담을 줄여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